연혁과 황벽종엔메이지에 대하여
고쿠라성은 하나의 믿음 위에 배치되었습니다. 재앙은 북동쪽에서 들어온다는 믿음입니다. 그 방위를 귀문(鬼門)이라 부릅니다. 엔메이지는 성의 북동쪽 언덕에 그 길을 막아서듯 세워졌고, 불에 타고 자리를 옮기면서도 삼백 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긴 이야기연혁
부젠 지방에서 꾼 꿈
엔메이지의 시작은 일본 천태종을 연 승려 사이초(最澄), 시호로는 덴교대사(傳敎大師)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합니다. 당나라로 건너가기 전 항해의 안전을 빌며 여러 영지를 순례하던 중, 부젠 지방 시모게에서 꿈의 계시를 받고 산 아래에 절을 세워 보살을 모신 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 뒤로 구백 년이 흘렀습니다. 건물은 무너지고 절은 황폐해졌지만, 법등만은 조용히 이어졌습니다.
성을 지키는 절로 다시 서다
고쿠라번의 2대 번주 오가사와라 다다타카(小笠原忠雄)가 레이사이(靈濟) 스님의 청을 받아들여, 끊어져 있던 옛 절을 다시 일으켰습니다. 고쿠라성의 북동쪽에 해당하는 아카사카산 위에 큰 가람을 세우고 도호쿠잔 엔메이지(東北山 延命寺)라 이름 붙였습니다. ‘북동쪽 산의 절’이라는 뜻입니다.
성과 성 아래 마을을 지키는 기원 사찰로서 번주로부터 삼백 석의 사찰 영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아카사카산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번 안에서 으뜸이라 불렸고, 문인과 화가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습니다.
고쿠라 전쟁의 불길 속에서
막부 말기, 고쿠라번은 조슈번과 격전을 치렀습니다. 싸움은 언덕까지 번졌고, 아카사카산의 가람은 병화로 모두 불에 탔습니다.
그러나 관음당의 불상들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 나와 무사히 지켜졌습니다.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를 거치며, 그 불상들을 중심으로 지금의 자리인 가미토미노에 법당을 다시 세워 오늘의 엔메이지가 되었습니다.
경내의 석불과 석비둘러보기
올라가는 길에 지나치는 것들은 장식이 아닙니다. 하나하나에 이유가 있습니다.
금강역사(인왕)
산문 양쪽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두 분입니다. 한 분은 입을 벌려 ‘아(阿)’ 소리를 내고, 다른 한 분은 입을 다물어 ‘훔(吽)’을 냅니다. 처음과 마지막 소리, 곧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뜻하는 동시에, 절 안으로 삿된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수호신입니다.
육지장보살
불교에서는 중생이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의 여섯 세계를 윤회한다고 봅니다. 그 여섯 곳 어디에도 구원의 손길이 닿도록, 지장보살을 여섯 분 모셨습니다. 붉은 앞치마는 아이의 무사를 비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걸어 둔 것입니다.
미즈코 지장(水子地蔵)
태어나지 못했거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위한 지장보살입니다. 가족들이 오랜 세월 조용히 찾아오는 자리입니다. 발치에 장난감이나 작은 옷이 놓여 있다면 부모가 두고 간 것이니, 조금 떨어져 낮은 목소리로 지나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석비와 시비(詩碑)
경내 곳곳에 엔메이지의 내력을 새긴 비석과, 고쿠라의 문인들이 남긴 하이쿠 시비가 흩어져 있습니다. 번역은 붙어 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누군가 자기보다 오래 남기고 싶었던 말입니다.
황벽종
엔메이지가 속한 종파“자기 발밑의 일을 규명하라”
일본의 선종은 셋입니다. 임제종과 조동종은 한국에도 비교적 알려져 있지만, 세 번째인 황벽종은 가장 늦게 성립했고 가장 중국색이 짙습니다. 에도 시대 초기, 명나라의 승려 인겐 류키(隱元隆琦) 선사가 1654년 일본에 건너와 그대로 정착하며 전한 종파입니다.
늦게, 그리고 통째로 건너왔기 때문에 황벽종에는 명나라 시대의 형식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독경은 중국식 발음으로 이어지고, 법요에서는 북과 징을 쓰는 음악적인 범패(梵唄)가 울립니다. 흔히 ‘선(禪)’ 하면 떠올리는 적막과는 사뭇 다른 소리입니다. 사찰 음식인 후차 요리(普茶料理) 또한 한 상에서 나누어 먹는 중국식입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형식 아래에 인겐 선사가 남긴 가르침은 단순하고 직접적입니다. 밖을 보지 말고, 지금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으라는 것. 이곳에서의 좌선은 그 물음을 위한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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